독립운동가 출신 문형순 전 모슬포경찰서장. 문 서장은 제주 4·3 당시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부당하다”며 이행하지 않고 수백명의 목숨을 구했다. 경찰청 제공
경찰청은 독립운동가 출신인 문형순 전 모슬포경찰서장이 6.25 참전유공자로 결정됐다고 3일 밝혔다. 경찰청은 문 전 서장의 독립유공자 지정을 시도해 왔으나, 이는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경찰에 따르면 문 전 서장에 대한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심사는 총 6차례 이뤄졌다. 경찰청은 2018년 문 전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6번째 독립유공자 지정을 추진했다. 보훈부는 사실상 기각 판정인 ‘서훈 보류’ 결론을 내렸는데, 보류 사유로는 ‘자료상의 인물과 동일인 여부 불분명’ ‘독립운동 활동 당시 입증자료 미비’ 등을 들었다.
경찰은 지난해 7월 문 전 서장을 독립유공자가 아닌 참전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보훈부에 재차 요청했다. 경찰청은 “문 전 서장이 6·25 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재직하며 ‘지리산 전투사령부’에 근무한 이력에 착안해 독립유공이 아닌 참전유공으로 국가보훈부에 서훈을 요청했다”며 “보훈부가 지난해 12월 문 전 서장에 대한 참전유공자 등록을 마치고 그 결과를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문형순 전 서장의 경찰인사기록에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국민부 호위대장 등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력이 기재돼 있다. 경찰청 제공
1952년 작성된 ‘지리산전투경찰사령부 사령원부’에 문형순 전 서장의 이름이 적혔다. 경찰청 제공
문 전 서장은 1897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고, 한국의용군과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한 그는 4·3 때인 1949년 모슬포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무고하게 끌려온 주민 100여명을 훈방했다. 1950년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재임할 때는 군 당국이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명령을 내리자 ‘부당한 명령이므로 이행할 수 없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1953년 9월 제주청 보안과 방호계장을 끝으로 퇴직한 문 서장은 1966년 6월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로 유족 없이 생을 마감했다. 문 서장의 시신은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평안도민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경찰 관계자는 “문 서장이 참전유공자로 등록됨에 따라 제주호국원과 협의해 국립묘지 안장을 추진하는 등 경찰 영웅으로서 최고의 존경과 예우를 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놓는 것) 했다. 4·3 토벌작전이 이어지던 제주에서는 과거 한 번이라도 군·경에 끌려갔다 온 적이 있거나 무장대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대거 구금돼 대부분 집단 희생됐다.
그러나 성산포 지역만은 예외였다. 김 중령이 성산포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공문이 실행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초대 성산포 경찰서장인 문형순(1901∼미상·평안북도)은 전시 상황에서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명령서 상단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글을 써 돌려보내 상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예비검속으로 인해 제주도민 수천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문 서장이 있었던 성산포 관내에서는 단 6명만 희생되는데 그쳤다. 그가 아니었다면 마을 주민 수백명이 총살되거나 다른 지역 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인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컸다.
문 전 서장이 성산포 경찰서로 옮기기 전 모슬포 경찰서에서도 4·3사건 당시 '자수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한 많은 주민을 살렸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1948년 말 '초토화 작전'의 학살극이 벌어지던 당시 '자수사건'이 잇따랐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무장대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말하며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란 협박이 뒤따랐다. 자수자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고 토벌대는 이들을 가차없이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