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77세 일본인이 매일 아침 한국 노동자들 곁에 서는 이유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문제 해결 위해 오사카 선전전에 동참하는 히라타상 이야기

더불어 걷는 길 2025. 3. 19. 16:58
2022년 11월, 경상북도 구미시에 위치한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급작스레 청산을 선언하며, 당시 일하던 노동자 210명을 희망퇴직, 정리해고의 형태로 전부 내보냈다. 그중 7명의 노동자는 여전히 회사를 상대로 '고용승계'를 주장하며 싸우고 있다.

하지만 한국옵티칼하이테크의 지분을 100% 가진 일본 기업 '닛토덴코'는 한 차례도 노동조합과 교섭하지 않았다. 결국 노동조합은 닛토덴코 오사카 본사를 방문하기 위해 일본 원정단을 꾸렸다. 2025년 1월 20일, 원정단이 출국하여 오사카에서 매일 닛토덴코를 찾아가며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원정단의 투쟁은 소수의 원정단원끼리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지원하는 일본의 노동자들이 있다.

그중 매일 아침 선전전에 참여해 시민들에게 전단지 선전물을 열심히 나눠주는 히라타 아사코상(아래 '히라타상')을 만났다. 같은 노동조합도 아니고 같은 해고자도 아니고 심지어 같은 나라 사람도 아닌데, 히라타상은 왜 아침마다 일찍 나와서 연대 활동을 하는 걸까? 2025년 3월 10일, 오사카 이바라키역 근처 한적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간호사 노동조합을 시작하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히라타상아침 선전전에서 히라타상이 시민들에게 전단지 선전물을 나눠주고 있다. ⓒ 이훈관련사진보기

1947년에 태어난 히라타상은 올해, 만 77세이다. 히라타상이 18세가 되던 해, 오사카에 왔다. 기술을 가진 전문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간호사 학교로 진학했다. 21세, 히라타상은 오사카에 있는 한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일이 엄청나게 힘들었다. 많은 환자를 봐야 해서 식사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밥을 빨리 먹는 게 습관이 되었다. 77세가 된 지금도 히라타상은 인터뷰 전 같이 먹은 식사에서 10분도 안 돼서 식사를 끝냈다.

1977년 9월, 간호사 노동조합이 생겼다. 약 700명의 간호사 중 약 100명이 가입했다. 히라타상은 굉장히 기뻤다. 히라타상은 동료들에게 자주 "우리 노조 만들자. 계속 일할 수 있는 좋은 직장으로 만들자"라고 말하며 동료들에게 호소하듯 말하곤 했다. 노동조합의 첫 요구는 두 가지였다. '야간 타임에 간호사 인력을 추가 배치하라', '한 달 최대 야근 일수를 8일 이내로 제한하라'.

야간 타임엔 대학병원 각 과마다 간호사가 고작 2~3명이었다. 밤새 병원을 뛰어다녀도 환자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업무량이 아니었다. 그러니 야근도 밥 먹듯이 했다. 결국 교섭을 통해 야간 타임 인원 확대가 받아들여졌고 4~5명이 일하게 되었다. 전보단 여유 있게 일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의 활동동으로 노동조건만 개선된 아니었다. 조합원이 직접 기획해서 등산, 스키, 배구 등 문화 활동도 했다. '직장 교류회'라는 이름으로 다른 단체와의 연대 자리도 생겼다.

힘들어도 애틋했기에

물론 노동조합 탄압도 있었다. 노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사측 관리자는 "노동조합은 불꽃놀이같은 거야. '펑!'하고 터질 때 좋지만 금세 사라져"라고 말하며 노조에 대한 지지를 없애려 했다. 병원은 노동조합의 간부를 관리자로 승진시켰다. 평조합원은 절대로 승진시키지 않았다. 노조 간부는 관리자가 되면서 노조를 탈퇴해야 했다.

평조합원은 '노조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의 본보기가 되었다. 결국 노동조합은 점차 인원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남은 조합원의 단결력은 강하기에, 약 50년이 지난 지금도 노동조합은 남아있고 투쟁도 하고 있다. 히라타상과 조합원들은 자주 만나서 밥 먹으며 수다를 떨곤 한다.

2011년, 히라타상은 63세의 나이로 정년퇴직했다. 사실은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다. 히라타상은 평조합원이라서, 간호사로 일한 43년간 단 한 번도 승진하지 않았다. 승진이 안 되니 항상 야간팀이었고 항상 어려운 업무만 맡았다. 60세가 되어도 20대 초반의 신입과 똑같은 3교대 야간 근무를 했다.

노동조합을 그만두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히라타상은 노동조합을 선택했다. 병원을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히라타상은 그만두지 않았다. 애틋함. 그게 걸림돌이었다.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도무지 동료들을 두곤 노조를 탈퇴할 수도, 병원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지금도 히라타상은 가끔 병원 노조 사무실을 찾아간다. 노조 사무실을 청소하고 수다를 떨며 후배 동료들의 속마음을 듣고 돌아온다.

일할 때도 여러 사안에 연대 활동을 했지만, 정년퇴직 후엔 더욱 열심히 더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의 성노예 '위안부' 인권 활동, 부락해방운동, 원폭피해자 지원활동, 반전활동, 반원전 활동 등 다양한 일을 해왔다.

어느 날, 같이 활동하고 있는 방청자상으로부터 소식을 듣게 됐다. "히라타상, 한국의 노동자들이 오사카에 왔어. 닛토덴코한테 해고 당했다는데, 3~4명이서 매일 활동하고 있대". 히라타상은 조금 망설였지만, "한 명이라도 많으면 좋겠지. 내일 갈게"라며 옵티칼 투쟁에 연대를 시작했다.

과거의 잘못, 현재의 죄책감

닛토덴코 이바라키 연구소 행진닛토덴코 오사카 이바라키 연구소에서 일본원정단과 노동조합, 연대자 등이 행진을 하고 있다. 한국노동자 고용을 보장하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이훈관련사진보기

사실 옵티칼에 연대 가던 첫날, 히라타상은 긴장이 많이 됐다. '일본이 한국한테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는데... 나는 그동안 한국 교포들이 받은 차별을 알면서도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관여하지 않았는데...' 과거에 국가가 저지른 범죄, 과거의 자신이 고개 돌렸던 한국 교포의 현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제와서 '같이 하겠다'고 찾아가는 게 죄스러웠다. 창피했다. 미안했다. 그렇게 며칠간 아침마다 긴장한 상태로 선전전에 함께 했다.

원정단이 반가워하며 건네는 몸자보를 입었고, 전단지를 시민들에게 최선을 다해 나눠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됐고 죄스러웠다. 원정단이 '히라타상 고마워요'라고 말하면 세차게 손을 흔들며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한국의 노동자에게 일본 사람이 연대한다는 건 복잡한 일이다. 그 많은 피를 흘리게 만든 조상들의 잘못을 현재의 우리가 갚아야 한다는 사실이 히라타상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1970년대, 한참 노동운동을 배우던 때, '혈채사상'을 배웠다. '피로 생긴 부채(負債)이니, 인생을 바쳐 갚아야 한다'는 뜻이다. 히라타상은 죄책감이 아침마다 몸을 일으켜 선전전에 향하게 하는 동력이었다.

복잡한 채로 즐겁다

히라타상이 일본의 연대자와 빵을 나눠먹고 있다.히라타상이 아침 선전전이 끝난 후 편의점 앞에서 다른 연대자와 빵, 커피를 나눠 먹고 있다. ⓒ 이훈관련사진보기

일본 편의점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히라타상히라타상이 아침 선전전이 끝난 후 닛토덴코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 이훈관련사진보기

어느 날, 원정단의 배태선 민주노총 경북본부 교육국장이 '휙' 히라타상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우리 커피 마시러 갑시다"라고 하길래 따라갔다. 대단한 카페에서 비싼 커피를 마신 것도 아니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120엔(약 1200원)짜리 커피를 뽑아 마셨다. 히라타상은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날부터 긴장감이 사라졌다. 10년째 공부하고 있지만, 늘지 않는 히라타상의 한국어 실력도 아주 조금씩 늘고 있다. 옆에서 한국말로 계속 말을 거니, 유심히 들으면 한 단어씩 알아듣고 대답할 때도 있다.

평범한 편의점 앞에서, 한국과 일본의 노동자가 뒤섞여 각자의 말로 수다를 떤다. 아침 공기는 아직 차갑고 얼굴에 닿는 햇살은 따뜻하다. 커피를 홀짝이며 뒤죽박죽 서서 간간이 들리는 한국어에 귀를 기울인다. 이제 히라타상은 죄책감, 미안함, 반가움, 흥미로움, 재미 등이 뒤섞인 복잡함을 기분 좋게 느낀다. 매일, 그 시간을 기대한다. 조금씩 커지는 노동 분야에 대한 흥미와 존경도 함께.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닛토덴코#한국옵티칼하이테크#노동조합#고용승계#NIT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