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들 협박에 못 이겨 죄 없는 후배를 공범이라고 했습니다"..전직 수사관의 '양심 고백'
[단독]"검사들 협박에 못 이겨 죄 없는 후배를 공범이라고 했습니다"..전직 수사관의 '양심 고백'
3년 뒤면 칠순인 A씨의 경기 남양주시 사무실에는 액자와 트로피가 가득했다. 1987년 검찰 수사관으로 입직한 뒤 굵직한 범인을 검거해 보도된 기사 스크랩과 피의자들을 연행하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자랑스레 전시돼 있었다. 사무실 한켠에는 각종 운동대회에 출전해 수상한 트로피도 한가득이었다. 액자와 트로피 수만큼 주변에 자주 무용담을 늘어놓는 그이지만 늘 이야기는 1991년에서 멈춘다.
1990년 10월 서울지방검찰청(현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하던 A씨는 자신의 비위를 고발하는 내용이 담긴 진정서를 위조했다. 이 과정에서 접수계 담당이던 말단 직원 이치근씨도 사건에 말려들었다. 이씨는 진정 내용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 A씨나 진정인과 사적 친분도 없었다. 하지만 “검사가 진정서를 가져오라고 했다”는 A씨의 말에 속아 진정서를 내줬다는 이유로 졸지에 피의자가 됐다. 이 와중에 A씨는 처벌받는 게 두려워 조사 도중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이씨를 홀로 남긴 채 도주했다
이씨는 A씨가 도피 행각을 이어가는 동안 검사들로부터 감금과 폭언을 동반한 강압수사를 당했다. 일주일간 검사실에 갇힌 상태로 조사에 임했고, 화장실에 갈 때마저도 감시를 받았다. 몽둥이를 손에 쥔 검사는 이씨를 향해 “범행을 실토하라”고 윽박질렀다. A씨는 이씨의 결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사들의 회유와 협박을 이겨내지 못했다. 조사에 응하기 위해 검찰에 출두한 A씨는 “이씨도 공범”이라고 허위 진술했다. 이씨는 1991년 7월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검사가 몽둥이를 들고 폭행하던 공안 정국이었다”는 변명만으로는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씨가 혼례를 올린 1993년 A씨는 미안한 마음에 꽃을 사들고 결혼식장을 찾았다. 그날 식장에서 회한의 눈물도 흘렸다. 그러나 이씨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 A씨를 용서하지 못했다. A씨의 무용담이 1991년에서 멈추는 이유다.

A씨는 지난 5월 이씨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금이라도 자신이 제대로 진술하면 31년 전 잘못된 사건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A씨는 이씨가 결백하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진화위에 제출하고, 향후 재심이 개시되면 법정에도 출석하겠다고 했다.
A씨는 15일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늦게나마 이치근이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은 이 사건의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진실규명을 신청한다고 하니 매우 미안하고 저 역시도 간절한 심정”이라면서 “재심을 통해 이치근이 잃어버린 명예와 피해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씨와는 어떤 관계인가.
“1989년 이씨가 서울지검으로 발령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중앙부처 마라톤 대회가 있었는데 공무원 급수별로 대표를 뽑았다. 나는 7급 대표였고, 이씨는 8급 대표였다. 한두 달간 함께 훈련을 한 게 전부다. 나는 검사실에 있었고, 이씨는 접수계에 있어서 업무상 마주칠 일도 없었다.”
-어떤 이유로 진정사건이 접수됐나.
“당시 사기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핵심 참고인이 있었는데, 진술서를 작성하는 자리에서 회와 술을 대접했다. 이후 이 사건 피의자가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됐다. 참고인은 자기 로비 덕에 피의자가 기소중지가 아니라 무혐의를 받았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피의자가 로비 대가로 약속한 돈을 주지 않자 나를 엮어 ‘피의자로부터 10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며 허위로 진정을 낸 것으로 알고 있다.”
-왜 진정서 위조를 결심했나.
“하루는 퇴근하는데 진정서를 제출한 참고인이 나를 찾아왔다. 무혐의가 아닌 기소중지라는 걸 알게 됐고, 허위 진정을 낸 사실이 알려지면 무고죄로 처벌받을까 두렵다고 말했다. 피의자가 내게 돈을 주는 것을 봤다고 쓴 부분만 빼달라고 사정을 하더라. 나는 그때까지도 진정서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자기가 뇌물 부분을 빼고 타이핑한 진정서를 들고 왔고 그제서야 내용을 확인했다. 사정이 딱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안 걸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진정 내용을 바꿨다.”
-이치근씨는 사기 사건 내용과 진정서 제출 배경을 알고 있었나.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치근은 사건에 대한 접근 권한이 아예 없는 사람이었다. 대검찰청에서 진정 내용이 서울지검으로 내려왔다는 것을 듣고 진정서를 관리하는 이치근에게 찾아갔다. 사기 사건을 수사하는 검사가 보려고 한다는 이유로 진정서를 달라고 했던 것 같다. 이치근과 나는 급수 차이도 있고, 검사가 보자고 하니 진정서를 안 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위조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진정서 위조 사실이 어떻게 발각됐나.
“사기 사건이 서울지검에 배당된 지 몇 달이 지났는데, 담당 검사가 대검에 정해진 기간 안에 보고를 안했다. 사건을 조사하다가 책상 뒤로 자료 일부가 넘어가 못 찾았다고 했던 것 같다.통상 결과가 보고되면 자료는 대검으로 안 넘어가고 서울지검에 보존된다. 그런데 보고가 늦어지니까 대검에서 수상하게 여겨 자료를 모두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진정서도 같이 이송됐다. 대검에서 갖고 있던 진정서와 서울지검에서 올라온 진정서랑 내용이 달라서 들킨 것이다.”

-이치근씨는 진정인과 일면식도 없는데 왜 유력한 용의자가 됐나.
“1차적으로는 진정서를 관리하는 담당자라서 그랬다. 또 처음에 내가 범행을 부인하다가 조사를 피해 도망을 갔다. 그 때만해도 검사들이 검사실에 가둬놓고 집에도 보내지 않고 밤샘 조사를 했다. 당시 화장실에 가는 척 하면서 도망을 갔다. 자칫 큰 논란으로 번질 수 있는 사안인데 나를 불러 조사할 수 없으니 이치근을 주범으로 몰아서 사표를 받고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한 것이다.”
-도망간 지 한 달 만에 자수를 했다고 들었다.
“언론에 이치근 사건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치근이 혼자 죄를 뒤집어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사들이 자꾸 이치근을 엮으려고 했다. 이치근은 수사 경험도 없고 진정 사건과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말단 직원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계속 이치근을 주범으로 몰았다. 이 사건은 언론 보도 후 장관에게 보고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이미 이치근을 주범으로 보고했는데 내가 자꾸 아니라고 하니까 ‘공범인 걸 인정 안하면 이치근만 기소한다’고 했다. 폐쇄회로(CC)TV를 포함해 이렇다할 증거가 없으니까 얼마든지 검찰 측에서 사건을 조작할 수 있었다.”
-검찰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이치근씨가 공범이라고 진술했나.
“하루는 조사를 받는데 서울지검 동부지청(현 서울동부지검)에 직원으로 있는 내 동생을 데려왔다. 내가 협조를 안 하니까 동생을 시켜서 협조하라고 했다. 이치근을 주범으로 몰겠다는 협박도 계속 됐다. 그렇게까지 이치근을 나락에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이치근은 내가 진정서를 보여달라고 해서 잠깐 보여준 것밖에 없지 않느냐. 고민하다가 ‘내가 주범, 이치근이 종범’이라고 진술했다.”
-30여년 만에 진실을 말하게 됐는데.
“내가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이치근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다. 이제라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싶다. 평생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이치근 이름 석자만 떠올려도 온몸이 눌리는 듯한 중압감이 들었다. 반드시 재심이 진행돼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으면 좋겠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