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돈 없으면 서울서 못 산다"..서울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이젠 돈 없으면 서울서 못 산다"..서울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문광호 기자 입력 2021. 08. 30. 15:38
[르포]"이젠 돈 없으면 서울서 못 산다"..서울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daum.net)
[경향신문]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 주민 김동안씨(60)가 지난 26일 집 앞으로 나와 취재에 응하고 있다. 문광호 기자.
“평생을 안 좋은 환경에서 살다가 떠난다는 게 너무 아쉽고 억울하죠. 같은 인간이지만 누구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앞으로는 돈 없으면 서울에 못 사는 거예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주민 김동안씨(60)는 재개발을 앞둔 심정을 토로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104번지 일대 실거주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그의 집은 용마루가 주저앉았다. 고치고 때워가며 어떻게든 버텼지만 지친 이웃들은 거의 다 골목을 떠났다. 그는 “보다시피 못 살지 않나. 그러니 다 팔고 떠나버렸다”고 했다.
김씨의 소원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이 불암산 기슭에서 사는 것이었다.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의 집 앞까지 올라와 마을을 둘러볼 때만 해도 소원은 손에 잡힐 듯했다. 두어 차례 분 재개발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떠나갈 때쯤엔 그도 흔들렸지만 꿈을 놓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악착같이 버틴 결과는 냉혹했다. 재개발이 본격화한 2021년, 투기 바람을 타고 높은 가격에 형성된 분양가 시세는 고스란히 분담금 부담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남은 사람 중 여기 계속 살 수 있는 사람은 열에 서너 명도 안될 것”이라며 “새 아파트 추가 분담금이 3~4억원 정도로 예상되는데 실제로 그렇다면 입주권을 팔고 서울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융자를 해준다고 해도 나이 먹은 사람은 평생 갚아도 못 갚는다. 이 동네 사람들의 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6일 오전 백사마을 풍경. 길고양이가 풀숲에 숨어있다. 문광호 기자.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인 백사마을은 1967년 서울 도심개발정책으로 살 곳을 잃은 철거민들이 모여 형성됐다. 산기슭을 따라 들어선 콘크리트집들은 50년 세월 동안 금이 가고 무너졌다. 재개발을 기대하고 외지인들이 사들여 세를 주지 않고 비워둔 집도 많았다. 1200세대의 큰 마을에 이젠 150여세대만 남았다. 지난 26일 찾은 백사마을에는 길고양이와 목줄 없는 개들이 주인인 양 골목을 배회했다.
재개발에 대한 주민들 반응은 엇갈린다. 다수는 열악한 주거환경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그러나 일부 영세 원주민들은 재개발이 완료돼도 신축 아파트가 지어질 백사마을로 돌아올 수 없다. 분담금 부담 때문이다. 분담금은 분양받은 아파트를 취득하기 위해 추가로 납부해야 하는 비용으로 통상 아파트 분양가에서 건물, 토지 권리가액(보상액)을 제한 금액이다. 백사마을 주민들은 분양가에 비해 보상액이 적어 분담금 부담이 크다고 말한다. 20년간 백사마을에 산 주민 A씨는 “원주민들은 추가 비용 때문에 거의 쫓겨나는 상황”이라며 “보상가는 공시지가의 130% 수준인데 백사마을 공시지가 자체가 낮아서 분담금 부담이 커진다”고 말했다.
은행 대출을 받아 분담금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60살인 김동안씨가 스스로 ‘젊은 축’이라고 할 정도로 백사마을 원주민 대부분이 고령층이기 때문이다. 백사마을경로당 사무장인 김민수씨(83)는 “백사마을 주민들은 돈 없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재개발이 되면 대부분이 나간다고 봐야 한다”며 “은행 대출을 받아 분담금을 낼 수도 있겠지만 우리 같은 늙은이들한테 대출을 해주겠나”라고 말했다.
지난 26일 오후 백사마을 풍경. 문광호 기자
백사마을 토지 대다수가 공유지분 형태인 것도 대출받기 어려운 이유이다. 공유지분제에서는 자신의 몫에 대해서만 대출을 받을 수 있는데, 공유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80% 수준으로 대출 한도가 제한된다. 이 지역 부동산 B 공인중개사는 “토지가 지분제라 대출이 어렵다”며 “대출을 100% 받으려면 지분을 공유한 다른 사람들이 다 동의해줘야 하는데 (위험부담이 있어) 동의해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백사마을 주민대표회의는 원주민들의 경우 프리미엄을 얹어 건물과 토지를 팔고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손해 보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황진숙 주민대표회의 위원장은 “분담금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일은 어느 재개발이나 다 있다”며 “조합원 분담금도 지금 아파트 시세에 비해서는 엄청 싼 금액이고 차액이 있으니 그걸로 또 집을 장만할 수도 있어서 쫓겨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중도금, 잔금 대출은 SH(서울주택도시공사)나 시공사에서 도와줄 것”이라며 “외부인들이 들어오는 것도 있는 사람들이 여윳돈을 갖고 사는 건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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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호 기자 moonli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