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동안 쌓인 먼지를 털고, 낡은 자리를 고치고, 새로운 길로 향하는 2025년. 충북 옥천 골목길 곳곳, 바느질 한 땀과 깨끗한 다림질로 낡은 옷을 고치고 빛내는 수선집과 세탁소 이야기를 전합니다. 소박하게 자리를 지켜온 장인들을 통해 일상을 지탱하는 힘을 봅니다. 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1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기자말] |
옷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가 담긴 옥천읍 금구리 '꼬맬래쭈릴래'는 그에게 수선집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다. 지금 자리에 정착하기까지 다섯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는데, 이 일을 놓지 않는 데에는 그의 집념과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고. 평생의 노력과 흔적이 녹아든 꼬맬래쭈릴래의 변천사를 신미균(64, 옥천읍 금구리)씨에게 들어봤다.
47년 수선 경력의 시작

▲층븍 옥천의 '꼬맬래쭈릴래' 그리고 신미균씨. ⓒ 월간 옥이네관련사진보기
대다수 사무실과 상가가 하루를 시작하느라 분주한 오전 9시. 꼬맬래쭈릴래는 그보다 2시간 앞선 7시부터 골목길을 밝힌다. 운영 시작 시간은 오전 8시이지만 부지런함이 몸에 밴 신미균씨는 그보다 일찍 수선집 문을 열어두곤 한다. 그런 그의 부지런함 덕분인지 오전부터 수선집 문턱을 넘는 손님이 많다.
"일찍 문 여는 걸 아셔서 출근길에 수선 맡기는 손님이 많아요. 대부분 바지 길이 수선인데 겨울 되고선 외투를 맡기는 분이 많아졌어요. 코트 안감이 터지거나 겉감 마감이 해진 것들이죠."
쉼 없이 오는 손님들 덕분에 수선집 한편엔 신미균씨 손길을 기다리는 옷이 벌써부터 한가득이다. 점점 쌓이는 일에 마음이 조급할 법도 한데 가위질 한 번, 다림질 한 번에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특히 옷감과 같은 색의 실을 찾기 위해 500여 개가 넘는 실을 대조할 땐, 딱 맞는 실을 찾을 때까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다.

▲수선할 옷과 꼭 맞는 색깔의 실을 찾고 있는 신미균씨. ⓒ 월간 옥이네관련사진보기
"조금만 색이 달라도 눈에 확 띄어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생각하고 넘기면 결과물이 영 별로예요. 제게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은 손님 눈에도 똑같더라고요. 그러니 실 하나도 꼼꼼하게 확인해야 해요."
자신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서 그의 고집이, 섬세하지만 빠른 손놀림에선 그간의 세월이 느껴진다.
"17살에 처음 시작해 20대 중반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일을 놓지 않았으니까, 수선한 지 45년쯤 된 것 같아요."
1970년대는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던 시기로 많은 이가 양장점에 취직하던 때다. 신미균씨 또한 생계를 위해 중학교 졸업 후 친언니의 제안으로 양장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자재 가게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는 심부름 시기를 보내고서야 바늘을 잡을 수 있었는데 그때 처음 배운 것이 싸개단추(옷과 같은 직물이나 옷과 조화되는 소재로 감싼 단추) 꿰매기다.
"양장점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배운 게 싸개단추였어요. 지금은 기계로 눌러서 금방 하지만 옛날에는 일일이 손으로 바느질했죠. 플라스틱 단추에 천을 덧대 꿰매는 건데 단추 크기에 맞게 천을 자르는 게 중요해요. 너무 크게 잘라서 천이 남지 않게, 작게 잘라서 모자라지 않게 딱 맞게요. 그리고 단추를 잡아맬 수 있게 실로 천 끝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마무리해요. 이게 가장 기본, 이걸 해야만 다음을 배울 수 있어요."
오랜 시간 터득한 수선 기술은 신미균씨의 자부심이지만 거기엔 오랜 시간 인내하며 배운 시간이 있었다. 특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양장점 일에 첫째, 셋째 주 일요일만 쉴 수 있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 시절에는 주 6일 출근이 기본이었어요. 일 자체보다도 쉬는 날이 적어서 힘들었죠. 친구들은 일요일마다 쉬는데 저는 한 달에 두 번밖에 못 쉬어서 부럽기도 했고요. 그래도 그때는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으니까 다른 생각 않고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몸의 고됨이 커 즐거울 새도 없이 바빴던 10대 시절을 지나 20대 중반 결혼 후에도 그는 집과 양장점을 오가며 살아내기에 바빴다. 돌아보면 힘들긴 했어도 동료들과 한 팀으로 옷을 만드는 그 시기만의 즐거움이 있었다고 말한다.
"서울 명동에서 일했는데 한 건물에 양장점이 몇 개씩 있었어요. 맞춤복 하던 시대니까 거리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양장점이었죠. 김창숙 부띠끄 같은 디자이너 패션 회사가 많이 생기던 시기였고요. 공장식 옷이 아니어서 미싱사, 웃제자, 중제자(다리미질), 마도메(꿰매기), 심부름, 5명이 한 팀이 돼서 옷을 만들었어요. 같이 한 땀 한 땀 만든 옷을 보면 뿌듯했죠."

▲층븍 옥천의 '꼬맬래쭈릴래' 그리고 신미균씨. ⓒ 월간 옥이네관련사진보기
1980년대 기성복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양장점에서 9년간 일하며 웃제자 역할을 가장 오래 해왔다는 그다.
"미싱사 밑에서 일하는 조수들을 웃제자, 중간제자라고 불렀어요. 일을 배워서 한 단계씩 올라가는 식이었는데 웃제자를 오래 했었죠. 전체적으로 옷의 모양을 잡아주고 주머니 만드는 일을 했어요. 26살에 결혼하고 출산하면서 미싱까지 못하고 나오게 됐고요."
미싱사까지 못 올라간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웃제자로 보내온 시간 덕분에 재단에 대한 감을 익힐 수 있었다고.
"제가 재단을 배운 적이 없는데 패턴을 그려서 옷을 만들어요. 미싱은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능적인 기술이라면 웃제자는 옷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수선뿐 아니라 옷 만드는 기술도 배워서 지금까지 잘 쓰고 있어요. 수선 일로 바빠서 많이는 못 하고 가족, 친구, 제 옷은 종종 만들어 입곤 하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더 잘된 일이었구나 싶어요."
10여 년 만에 찾은 자리

▲층븍 옥천의 '꼬맬래쭈릴래' 그리고 신미균씨. ⓒ 월간 옥이네관련사진보기
서울에서 양장을 하던 그가 충북 옥천에 온 것은 2000년. 갑작스레 닥친 IMF 외환위기는 신미균씨 가족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남편의 고향인 옥천으로 온 게 된 것은 어려워진 가정형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서울에서 밀려 난 거죠. 일자리를 잃어서 힘들었는데 옥천에 시부모님이 계시니까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남편을 설득해서 왔어요."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일이 막막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로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때 첫째가 중학교 2학년,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 셋째가 5살이었으니까 뭐라도 해야 했어요. 옥천에 처음 왔는데 주공세탁소(옥천읍 문정리)에서 수선하는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들어갔죠."
세탁소 한편에서 수선하기를 1년, 갑작스러운 세탁소 사장님의 이사 소식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사장님이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고 해서 옥천군보건소(옥천읍 삼양리) 쪽 골목에 가게를 차렸죠. 돈이 없어서 보증금 없는 곳을 찾다 보니 거기로 가게 됐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 문만 댄 가건물이었어요. 1년쯤 하다가 도저히 더 할 장소가 아닌 것 같아 다른 장소를 알아봤죠."
두 딸의 아이디어로 이름 지은 '꼬맬래쭈릴래'. 처음 마련한 자신의 가게에 이는 벅찬 마음은 더 오래 일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다. 재봉틀 두 대와 다리미 작업대 하나로 꽉 차는 좁고 허름한 공간이 아닌 안전한 작업 공간을 찾아 한 번 더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신기방앗간(옥천읍 금구리) 쪽 골목길로 이사 가서 7년 정도 했어요. 거기도 공간이 작았지만 손님은 많았어요. 특히 교복 수선하러 오는 학생이 많았죠. 벽면 한쪽이 교복으로 가득 찰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월세가 부담스러워서 또 이사를 가야 하나 고민이 있었어요. 그러던 참에 손님으로 자주 오던 세탁소 사장님이 가게에 남는 공간이 있으니 같이 하자고 해서 이사를 했죠."

▲층븍 옥천의 '꼬맬래쭈릴래' 그리고 신미균씨. ⓒ 월간 옥이네관련사진보기
월세를 안 받겠다는 말에 조금이라도 아끼고 싶어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세탁소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1년 만에 세탁소를 정리한다는 세탁소 사장의 말에 급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사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리를 새로 구해야 하는데 잘 안됐어요. 일을 쉴 수가 없어서 충북도립대학교(옥천읍 문정리) 근처 골목에 있는 가건물로 들어갔죠.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아이들이 대학을 다니던 때라 한창 돈이 필요해서 수선이랑 택배 일을 같이 했거든요. 그러다 살고 있는 빌라 주인이 빌라에 조그맣게 자리가 있으니 거기서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갔죠."
오래 일하고 싶은 마음으로 한 네 번의 이사. 10여 년 동안 계속되는 이사에 몸도 마음도 지칠 때쯤 만난 곳이 지금의 위치다.
"이 자리가 원래 지업사였어요. 10년 전쯤 사장님이 돌아가시고 자리가 나서 제가 들어온 거예요. 집에서 가깝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 위치가 좋았거든요. 간판도 잘 보여서 이전에 왔던 손님, 새로운 손님이 많이 찾아주셨어요."
택배 일을 그만둘 만큼 많아진 손님 덕에 오로지 수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차츰 자리 잡아 가는 가게에 예전에는 몰랐던 자신의 기술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제가 하는 일에 크게 만족을 못 했어요. 먹고 사는 일이 바빠 직업적 가치를 느낄 새가 없었거든요. 지금은 수선된 옷을 찾아가는 손님을 볼 때면 행복해요. 내 작업장에서 내가 가진 기술로 손님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죠."
언제나 함께할 수선

▲층븍 옥천의 '꼬맬래쭈릴래' 그리고 신미균씨. ⓒ 월간 옥이네관련사진보기
시간이 지날수록 직업과 기술이 주는 뿌듯함은 작업의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40여 년이 훌쩍 넘는 수선 경력에도 변하지 않는 공임비는 늘 아쉽다.
"지금 하의 밑단 수선하는 데 5000원 받아요. 공판장에서는 4000원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3000원이던 40년 전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진 게 없어요. 무려 40년이 지났는데 말이죠."
지난 세월 동안 물가 상승률을 생각하면 오히려 공임비는 마이너스나 마찬가지인 상황. 가장 속상할 때는 다른 수선집과 가격을 비교해 비싸다고 말하는 손님을 마주할 때이다.
"가장 많이 하는 수선이 하의 밑단이에요. 간단해 보여도 밑단 뜯는 것부터 재단, 박음질, 다림질까지 전부 수작업이라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어요. 손님 시간에 맞추려면 속도도 내야 하고요. 보통 사람들은 수선 과정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뚝딱 해내는 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완성까지 많은 품이 들어간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익혀온 기술이 단돈 몇천 원에 가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전하며 한 가지 부탁을 남겼다.
"전화로 수선, 가격 문의하시는 분이 많은데요. 옷의 상태와 원단을 봐야 수선이 가능한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가령 코트의 안감은 전체 교체가 안 되기 때문에 뜯긴 위치와 정도를 봐야 하는데요. 이런 부분은 전화로 충분히 소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능하면 방문하셔서 함께 의논하면 좋겠어요."
작업 틈틈이 짬을 내 이야기를 전해주던 신미균씨. 그런 그가 한참동안 말이 없는 때는 바로 실을 유심히 들여다볼 때다. 구석구석에 있는 실과 원단 색을 끈질기게 비교하더니 끝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검은색, 남색, 하얀색 실을 가장 많이 사용해요. 하지만 같은 남색이라도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다 달라요. 작은 것도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아 욕심 내다보니 실이 500개가 넘더라고요(웃음). 이만큼 실이 많은 곳도 별로 없을 거예요."

▲층븍 옥천의 '꼬맬래쭈릴래' 그리고 신미균씨. ⓒ 월간 옥이네관련사진보기
아무리 바빠도 수선의 질은 양보 못 한다는 그. 최고의 결과물을 향한 바느질을 위해 웅크린 몸이 펴질 새가 없다. 눈, 손목, 어깨 등 몸이 예전 같지 않을 때면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느낀다는데 그럼에도 80세까지, 그보다 더 오래 수선하는 모습을 꿈꾼다.
"한참 마음이 힘들었을 때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았어요. 지나고 보니 마음껏 욕심낼 수 있는 직업과 기술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다른 건 몰라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제 것이잖아요. 되도록 오래 욕심부리고 싶은데 몸이 따라 줄지 모르겠어요. 이 바람이 이뤄질 수 있도록 즐겁게 수선하고 싶어요."
꼬맬래쭈릴래 / 주소 옥천읍 금장로 62-1 / 운영 오전 8시~오후 3시(주말 휴무) / 문의 043-733-9976
월간옥이네 통권 91호(2025년 1월호)
글 사진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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