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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더불어 걷는 길 2022. 6. 12. 22:09

주한미군 윤금이씨 살해사건

최근 수정 시각: 2022-05-24 10:24:06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사건 내용3. 여담4. 참고 자료5. 둘러보기




피해자 윤금이 씨.



범인 케네스 마클 미합중국 육군 의무 이병.

Murder of Yun Geum-i

1. 개요[편집]

1992년, 경기도 동두천시 기지촌에서 주한미군인 케네스 마클 육군 이병이 당시 26세였던 민간인 여성 윤금이 씨를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학가에서 주한미군 철수시위를 불러일으켰으며 불평등한 주한미군 사법처리 문제를 환기시켰다.

2. 사건 내용[편집]

1992년 10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431-50번지에서 윤금이 씨(당시 나이 26세)[1]의 참혹한 시신이 집주인에 의해 발견되었고, 시신은 유가족에게 인도 후 화장됐다. 가해자는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제20보병연대 5대대 본부중대 의무대 소속 케네스 마클(Kenneth Lee Markle Ⅲ)[2] 의무 이병으로, 사건 후 미 육군 범죄수사대 경기지방경찰청 의정부경찰서가 수사에 나섰다. 이에 목격자들의 진술 및 제보로 신원이 밝혀져 잡혀갔으나, 얼마 안 가 미 육군 군사경찰대로 신병 인도됐다.

엽기적인 범행 장면도 세간에 충격을 줬지만 사건 조사 과정에서 불거진 한미관계의 불평등에 분노한 전국 50여개 시민사회단체들은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윤금이공대위)'[3]를 수립하여 시위를 시작하였으며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의 '미군 승차 거부 운동', 상인들의 '미군 손님 안 받기 운동' 등이 이어졌고, 공대위도 <피의자 케네스 마클 구속 및 엄중한 처벌과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란 성명서를 2사단에 제출했다. 시위는 동두천을 넘어 전국에까지 파급됐다. 더 나아가 SOFA 개정 요구도 힘을 얻었다. 다만 공무원이나 일부 보수적인 시민, 경찰 등은 "양공주 하나 죽었다고 세상이 이리 시끄럽냐, 하찮은 의 죽음으로 한미관계에 금 가게 할 순 없다." 는 식으로 시위를 맹비난했다.

게다가 윤금이씨 시체 사진이 대학가 등 집회장에 공개되면서 반미감정이 더욱 세어졌다.[4] 그러나 가해자 마클 이병은 재판 내내 관련 혐의를 부인한 채 시신 훼손은 자신을 질투한 제이슨 램버트 육군 상병이 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마클의 아버지도 아들이 한국 감옥으로 이감되지 않길 바라며 1994년 미국 연방대법원에 탄원서를 냈으나, 윌리엄 렌퀴스트 연방대법원장은 이를 기각했다.

결국 1심에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1993년 항소심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 전 윤금이 유가족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민사상 배상금 7,100만 원을 받았는데, 이는 2심 선고에 영향을 끼쳤다. 1994년 대법원도 2심과 동일한 판결을 내리면서 천안소년교도소에서 복역했으며, 1995년 어린이날 당시 교도소 복역 중에도 수감 동료인 미 육군 병사와 난동을 부리는 등 그닥 모범적으로 수감 생활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수감 중에 교도관에게 욕설 폭행을 일삼아 벌금 200만원이 선고되었으나 이를 납부하지 않아 노역 100일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6년 8월 가석방되었는데, 그 즉시 미국으로 잽싸게 출국했다. 이 사실은 두달 뒤에야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자료 요청을 해서 알려졌는데, SOFA에 따르면 주한미군 범죄자는 석방 뒤 한국 감독권에서 자동적으로 벗어나 미국 정부의 관리를 받는다. 그러나 미국 측이 공식적으로 그들의 소재지 및 생활태도 등 기초적 정보를 공지해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 사실상 현지에선 면죄부가 주어진다. 당연히 이와 별개로 마클 이병은 형 확정 즉시 미 육군에서 불명예 전역처리되어 제적되었다.

정치인 이정희가 한미관계 관련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이 사건이었으며, 여성학자 정희진에 의하면 원래 두레방 등 여성운동 그룹이 해당 투쟁의 주체였으나, 기지촌 여성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매춘여성들의 부정적인 사회적 낙인 때문에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게 되자 당시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NL운동권의 힘을 빌려야 했으며 이에 따라 투쟁의 초점이 여성인권에서 반미로 변질되는 한계점도 있었다. 당시 NL운동권은 '민족의 순결한 딸 윤금이' 같은 프로파간다로 대중정서를 자극하면서 이 사건을 자신들이 목표했던 주한미군 철수 투쟁으로 연결짓는데만 골몰하고, 실질적인 사건해결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5]

사건의 실질적인 해결과 후속조치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처음부터 참여했던 '두레방'으로 대표되는 개신교 운동세력이었는데, 이들은 미국이 윤금이 유가족들에게 배상금을 내게 하도록 협상력을 발휘했고, 국민일보도 여느 신문보다 시리즈 등을 중심으로 해당 사건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사건 이후에도 한미 양국이 SOFA 개정에 손을 대지 않아 미군 범죄는 연속으로 발생했고, 2000년 이태원 접대부 살인사건을 계기로 SOFA 개정 운동이 전개되어, 2001년부터 미군 범죄자를 기소 시점부터 한국 정부가 인도하는 쪽으로 SOFA 규정이 개정되었다.

3. 여담[편집]

  • 자우림의 2집 수록곡 동두천 Charlie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제목이 진범 이름인 Markle이 아닌 Charlie인 이유는 진짜 이름이 생각 나지 않아서 생각나는 아무 이름으로나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군 쪽에서 찰리라고 하면 동양인을 가리키는 뉘앙스가 있다.[6]

 

  •  
  • ROK Drop이라는 한국 관련 이슈를 다루는 블로그에 그와 같은 육군 소대에 있었다는 Stephen Marks라는 이의 증언이 댓글로 올라왔는데(#) 해당 댓글의 내용에 따르면 마클 일병과 자신은 1991년도 켄터키 주 포트 녹스에서 같은 소대에 소속되어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던 사이인데 당시 마클이 자신의 전화 카드를 훔쳐서 무려 500불어치의 장거리 통화를 하는 데 사용했고 그 사실이 적발되어 마클은 다른 소대로 전출 당하고 군사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받으며 무단으로 훔쳐 쓴 비용에 대해 배상하는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마클이 나중에 한 여성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으며, 마클에 대해서 '거만하고 시끄러운 사고뭉치였고 상습적인 거짓말쟁이였던데다 조국과 지휘관, 동료 사병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여성에 대한 존중심도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또, 만일 마클이 자신의 전화 카드를 훔쳤을 때 영구적으로 불명예 제대 처분을 받았더라면 추가적인 살인이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깝게 여긴다고 밝혔다.

4. 참고 자료[편집]

자우림(Jaurim) 동두천 Charlie (가사 첨부)

https://youtu.be/qSCUWy3k9sE

 

동두천 Charlie

 

얼어붙은 아침이슬 눈을 감은 너는 아직 한밤중

몸이 젖어 떨고 있나 어디 움직여 볼까

소리없이 흔들리는 가벼운 나의 어깻짓

우두커니 바라보는 힘없이 붙어있는 눈은

동두천CHARLIE 꽃다운 미스리의 가슴팍을 찔러 놓고

동두천CHARLIE 빛나는 계급장과 엄마품에 안기었지

동두천CHARLIE 말 못하는 풀잎처럼 누워있는 너는 아직 한밤중

목이 말라 말이 없나 어디 들어나 볼까

소리없이 흔들리는 가벼운 나의 어깻짓

우두커니 바라보는 힘없이 붙어있는 눈은

동두천CHARLIE 꽃다운 미스리의 가슴팍을 찔러 놓고

동두천CHARLIE 빛나는 계급장과 엄마품에 안기었지

동두천CHARLIE 꽃다운 미스리의 가슴팍을 찔러 놓고

동두천CHARLIE 빛나는 계급장과 엄마품에 안기었지

동두천CHARLIE 동두천CHARLIE 동두천CHARLIE